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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

  • 무속인나라
  • |
  • 2017-04-14
  • 조회수 1485
⊙서울대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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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신신앙(洞神信仰)의 종교 • 사회적 기능

둘째, 사회적 정통성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동신신앙의 사회적 기능이 논의될 수 있다. 
서울지역 동신제의 진행실태에서 본 바와 같이 
전통적인 마을마다 정초에 택일해서 밤에 거행되는 
신제는 그 마을 동민들의 전통적인 생존방법에 
의해 동신에게 새해에도 동민들이 병 없이 건강하고 
생업이 번성해 풍요롭게 잘 살도록 해 달라고 빈다. 

이럴 때 동신제는 과거 수십년, 또는 
수백년 동안 조상들이 지내던 동신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동민들이 같은 마을의 공동운명체라는 
자기 소속감을 다시 확인시켜 주고, 
그래서 과거 조상들이 생활해 온 ‘본(本)’을 그대로 이어간다. 

이와 같은 ‘본’이 그 마을의 사회적 구심점이 되어서 
과거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이어, 사회변동 속에서 
그래도 한 가닥의 제동적(制動的) 구실로 마을의 
보수적 전통이 그 마을의 사회적 정통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째,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동신신앙의 
사회적 기능이 검토될 수 있다. 
서울지역 동신제의 추진실태에서 본 바와 같이 
동신제를 지내는 마을에서는 어느 곳이나 동신제 전에 
동회(洞會)를 열어서 제의 전반에 관한 것이 협의된다. 

동회에서 동민들이 협의하여 제관(祭官)을 선출하고 
제의 비용을 결정해 동민 전체 의사가 반영된 
민주적 방식으로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동신제가 끝난 이튿날 아침이 되면 동민들이 
전부 동신제를 주관한 당주(堂主) 집에 모여 
제사에 차린 제물을 고루 나누어 먹고 제비를 계산해 
수입과 지출을 명확히 밝히고 여분이 있으면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적립시키거나 마을의 공동경비로 사용한다. 

그리고 동민들이 회식하며 결산하는 자리에서 
동사(洞事)를 협의한다. 
동신제의 이와 같은 절차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한국 재래의 전통적인
대동의결(大同議決)의 민주적 기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신신앙의 사회적 기능은 모든 문물의 
중심지로 급속히 변해 산업화되어 가는 오늘의 
사회변동 속에서 그래도 서울의 전통을 
지켜가는 보루(堡壘)가 되는데, 
동신제에서 동민들의 단합과 소속감의 고취, 
민주적 협의 • 협동 등은 인정이 고갈되어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서울시민들에게 본(本)이 
될만한 중요한 생활적 귀감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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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신앙(巫俗信仰) 개관
서울은 과거 조선시대 500년 동안의 수도였고 
오늘날에도 한국의 수도로 계속되고 있다.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 경제를 
포함한 문화 전반의 중심이 되어온 수도 
서울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무속이 과거에는 

어떤 형태로 어떻게 있었고, 또 오늘날에는 어떤 형태로 
어떻게 전승되면서 그런 무속을 신봉하는 주민들에게는 
무속이 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알아보자. 
여기서 사용한 자료는 김태곤(金泰坤)이 1964년에서 
1988년 사이에 실시한 서울지역 무속의 현장조사 자료이고, 
과거의 자료는 기록으로 전하는 문헌자료이다.

서울 무속의 내력
서울 무속의 역사는 서울이 조선의 도읍지로 
정해지면서 고려 때부터 전승되던 
무속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조 2년에 무격(巫覡)의 과전(科田)에 관련된 기록[註]이 있는 
것을 보면 고려 때의 무속이 조선으로 이어지고, 
서울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져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서울 안에도 무속이 종교적 현상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당시의 무속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존재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기록으로 
전하는 자료를 통해서 조선시대 특히 서울인 도성(都城) 안과 
궁중에 무속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도 무속에 관한 긍정적 기술이거나 자료 보존적인 
기술이 아니고 주로 유신(儒臣)들이 무속을 음사(淫祀)로 
규정해 비판하는 단편적인 문맥 속에 묻혀있는 자료들이어서 
당시 무속의 전모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면서도 이런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서울의 무속에 대하여 
① 나라에서 거행하는 기우제(祈雨祭)에 무당들이 제(祭)를 올리고 
② 의료기관으로 무(巫)의 관서(官署)가 있었으며 
③ 나라에서 정하는 국무(國巫)가 있었고 
④ 유신들의 반대로 무당들이 성 밖으로 축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① ② ③은 무속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긍정적 입장으로 보이고, 
④는 유교와 무속 사이의 갈등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과 『문헌비고(文獻備考)』등에 
가뭄이 극심할 때 나라에서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기우제에는 무당들이 동원되어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註], 
세종 때에도 한양에서 무당들을 모아 기우했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註] 

무(巫)의 관서로는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와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이 있었는데, 
동서활인원이 후에 동서활인서로 바뀌었다. 
원래는 도성 동쪽과 서쪽에 각각 활인원이 있었으며, 
질병을 치료하는 공적 의료기관이었다. 

동서활인서 역시 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활인서를 함께 묶어서 부르는 호칭이다. 
이 동서활인서에는 의원과 무당을 두어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직무에 태만해 병이 낫지 않을 때는 
무당의 과실을 물었으며, 
동서활인서에 속한 무당에게는 세금과 잡역(雜役)을 면제시켰다.

인조 24년에는 전염병이 돌아 동서활인서를 
거친 환자가 1,386명이나 되었다. 
동서활인서에 의원과 무당을 배치한 것은 의원이 의약 
치료를 맡고 무당이 종교적 치료를 맡아 환자를 
입체적이고도 유기적으로 치료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註]


 - 무속인나라 공식 협력업체 한국무속협동조합 - 무속신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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