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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의 역사성

  • 무속인나라
  • |
  • 2017-04-04
  • 조회수 689

⊙무속의 역사성


시월에 동맹이라는 천신제를 지내며 수호신을 맞이했다. 우리들은 무속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하나는 무속이 매우 오랜 우리 민족의 원시종교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대로 소급하여 소위 제정일치 시대에 사회적 지위가 높은 무당이 사회적, 정치적 지도자를 겸했을 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말할 것도 없이 진화론적이다. 진화론 자체가 상당히 강한 비판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진화론에 대해 논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속이 필요 이상으로 역사과학에 지나치게 이용당해 왔던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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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은 말할 것도 없이 진화론적이다. 진화론 자체가 상당히 강한 비판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진화론에 대해 논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속이 필요 이상으로 역사과학에 지나치게 이용당해 왔던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종래에는 흔히 무속을 가지고 우리 태고의 역사인 기원을 밝히려 했거나 우리 민족의 핵심적인 본질, 즉 한국 민족 문화의 정수를 찾으려 했다. 이는 역사학ㆍ문학ㆍ인류학ㆍ민속학 등에서 가끔 무속이 이상과 같은 목적에서 이용되었음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무속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적 문헌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과 무속 연구는 접근된다. 그러나 무속연구에서 지나치게 역사 의식을 가졌던 것은 문제이다. 특히 문헌 기록이 엉성하거나 전혀 없는데는 현존하는 무속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소급하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었다.

 

또 무속의 역사성이 강한 것으로 믿고 역사에 이용한 것도 잘못이었다. 우리들이 생활 주변에서 만나는 민속이나, 무당들로부터 채록된 자료에 역사성이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객관적 분석을 통해 그것이 어는 정도 역사적으로 소급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현존의 무속보다는 생산적인 무속

 

현존하는 것 중에서 고형을 찾아내서 역사를 소급하려는 태도가 때로는 직관적이고 관념적인 경우가 많다. 소급한다고 해도 1세기를 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무속을 가지고 쉽게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사회를 연상하는가 하면 무속이 우리 문화의 아주 본질적인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 주체의식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곧 잘 등장하곤 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에 비해 무속이 압도적으로 한국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또 무속을 미족문화의 정수라거나 태고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미화의식과 현대사회의 도피의식일지 모른다. 복잡화해 가는, 분화해 가는, 조직화해 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부조화로부터의 도피, 과거에 대한 환상으로서 무속에 기대를 거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린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옛날'이라는 것이 역사학자의 시대 구분에 맞는 것도 아니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거나, 어른들의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얘기들이다. '이 마을에는 나무가 많았다' '호랑이가 많았다' '인심이 좋았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사실 사회는 변화하고 있고, 우리들의 체험으로써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화하려고 할 때 어렵게 된다. 특히 과거를 미화하려는 개인의 회상이나 체험을 주 대상으로 한 옛날 이야기와 같은 것을 연구할 때 우리들은 가끔 이러한 허상을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민속학이나 무속학(?)은 역사 기원적인 문제에 자신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무속학은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 현재의 입장에서 역사적 문헌을 보거나, 현존하는 무속을 보는 것이보다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종래 고고학적 유적ㆍ유물 가운데서 새나 동물상이 나오면 흔히 무속 자료를 동원해서 여러 가지로 존재의 의미를 추측하여 보고 심지어는 낭만적이기까지 한 여러 가지 상상을 했고, 그러한 생각들 가운데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몇 천년 전의 것과 현재의 것을 연결 짓는 근거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재의 존재가 과거의 연속에 의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과거의 긴 세월 동안에는 단절적인 문화도 상당히 존재할 수 있고, 몇천 년 전의 것과 지금의 것을 연결시키기 어려운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결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다 취할 수 있다. 다만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적 분석에 의한 것일 경우의 문제는 다르다.

 

과거를 알기 위한 학문으로서 고고학이나 역사학이 있다. 이들 학문은 유적이나 문헌 기록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자연히 자료와 방법에 제한을 받는다. 이를테면 화살촉이나 기록된 문헌 등만으로 생활 문화ㆍ생활철학ㆍ사상ㆍ애정 등에 관한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인류학은 처음에 이러한 역사과학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려는 보조과학으로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나라의 중요한 일도 무속에 의해 결정

 

그러나 발달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보조과학의 지위를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오히려 역사적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보조과학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역사과학보다는 사회과학으로 기우는 경향마저 생겼고, 과거보다 현재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고 분석하여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현재의 문화도 전통적 연속성 위에 선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 변화의 문맥 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현존 무속에 대한 연구라 하여도 그 역사적 문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 문헌 기록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는 것을 거부할 뿐이다. 사실과 전승을 함께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무작위적으로 이용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무속은 고대 문헌으로 알려진'삼국지'(동이전 기록)를 통해서 비교적 자세한 종교적 행위 의례 등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는 정월에 천신께 '영고'라는 제사를 드렸고, 병사가 있을 때는 소를 잡아 천신께 제사를 드리고 소의 발을 보아 길흉을 점치되 쪼개지면 흥하고, 합쳐지면 길하다고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집의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께 제사하고 영성과 사직을 모셨으며, 시월에는 '동맹'이라 하는 천신제를 지냈고 그때 수신을 맞이하여 지냈다. 예에서도 시월에 '무천'이라는 천신제를 지냈으며 또 호랑이를 제사 지냈다고 한다.

 

마한에서는 오월에 파종을 마치고 천신제를 지냈으며, 또 시월에는 나라마다 각기 한 사람의 천군을 뽑아 천신제를 지냈다. 이들 기록을 보면 제의가 집단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천신.산신 등의 대상 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제관인 천군을 뽑아 제를 지낸 것이며 또 소의 발을 보아 점을 친 이들 내용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천군'이라는 제사를 모시는 제관이다. 이 천군이 무당이니지 아닌지에 관심이 가지만 마을 사람 가운데서 뽑힌다는 것으로 보아 일반 사람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아직 직업적인 무당이 등장하기 이전에 비직업적인 가정신앙으로서의 샤먼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이상 추측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면 이러한 천군의 형태와 비슷한 것을 현존하는 민간신앙에서 찾아볼 때, 천군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부락제(동제)의 제관이다. 지금도 많은 마을에서는 일년에 한 번 또는 몇 년에 한 번 마을에서 제관을 선정하여 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는 유교식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축문을 읽는다. 이 제사의 형식이 유교식이라 하여 유교가 전래한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아끼바와 같은 학자는 재래 토착신앙이 유교식 옷을 입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여, 이 신앙의 본질은 보다 원초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도 그의 의견과 같다. 그렇다면 천군은 이러한 제관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닐까. 천군과 제관은 샤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소의 발굽을 보고 점을 쳤다는 기록은 무당과 결부되기 쉽다. 그러나 점이 무당의 점유물은 아니다. 세습무, 학습무나 심지어는 일반인도 점은 가능하다. 사실 우리들은 매일같이 점을 치면서 일상생활을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 무속인나라 공식 협력업체 한국무속협동조합 - 무속신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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